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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가 소식

`나는 악쓴다`로 둔갑한 `나는 가수다`

[한현우의 팝 컬처] '나는 악쓴다'로 둔갑한 '나는 가수다'

[조선일보2011/06/10(금) 10:00]

웬만하면 '나는 가수다'의 선의(善意)를 존중하고 싶지만, 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점점 그러기 힘든 쪽으로 가고 있다.

처음부터 '가창력'을 가수의 모든 것인 양 선전하더니, 이제는 아예 '나는 악쓴다'가 돼버린 형국이다.

박정현, 김연우, 심지어 BMK까지 멀쩡히 노래 잘 하던 가수들이

MBC 무대에만 서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고래고래 소리지르니, 안쓰럽다 못해 짜증이 난다.

가수들의 노래에서는 피로감마저 느껴져, 흡사 무슨 차력대회를 보는 것 같다.

대한민국 가수들이 무슨 목청 기능 보유자들인가.

↑ [조선일보]일러스트=이철원 기자

↑ [조선일보]한현우

기획취재부 차장

프로 뮤지션들을 모아놓고 점수를 매기고 일반 방청객들의 인기투표로 등수를 정해 꼴찌를 탈락시키는 방식은

음악에 대한 모독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진짜 음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얻겠다"는 기획의도엔 좋게 해석할 여지가 있었다.

그룹 '빛과 소금' 출신의 장기호를 비롯한 자문위원단의 면면도 그럴듯했고,

무엇보다 같은 방송사 안에서도 남남이다시피 한 라디오 프로듀서 가운데 '음악통(通)'들을 포함시킨 것도 신선했다.

'나는 가수다' 제작진은 애초 오랫동안 함께 작업해 온 음향 엔지니어를 쓰려다가

뮤지션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공연 전문 엔지니어를 영입했다.

그 결과 녹화가 진행되는 공개홀의 음향은 웬만한 공연장 사운드만큼 좋다고 한다.

이런 것 역시 한국 방송에서는 처음 시도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수다'는 어쩔 수 없이 태생적으로 '예능 프로그램'이다.

'음악 프로그램'의 상대적 의미로 그렇다.

어떤 식으로든 개그맨을 끼워 넣고야 말겠다는 예능 PD들의 확고부동한 의지는

"가수만 출연시켜서는 시청률을 올릴 수 없다"는 강박관념의 산물로 보인다.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과연 시청자들이 음악 그 자체에 집중하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데뷔한 지 10년이 훌쩍 넘은 박정현이 이제서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늘 혼자 카메라 세례를 받던 윤도현은 자신의 밴드 멤버들을 좀 더 소상히 소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건모의 탈락이 문제였다.

'나는 가수다' 1기 출연진 가운데

가장 정확한 음정과 호흡법을 갖고 있던 김건모가 방청객들에게 밉보인 것이다.

이것을 제작진이 임의로 번복하고

이에 시청자들이 항의하면서

이 프로그램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맨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실 음악팬들은 이 프로그램에 그렇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뛰어난 세션 연주자와 음향 엔지니어를 영입했으나

간주가 나올 때면 음악을 배경으로 가수 인터뷰가 나왔다.

이 프로그램의 정체는 '경쟁'이지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이런 연출에 대해 "간주를 그대로 내보내면

음원을 그대로 녹음해 불법 사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인터뷰를 더빙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옹색하다.

MBC의 음악 프로그램이었던 '수요예술무대'나 '음악여행 라라라'에서는 간주에 뮤지션 인터뷰를 내보낸 적이 없다.

상대적으로 TV 활동이 적었던 김연우가 이 프로그램에 등장한 것은 참신했다.

그러나 김연우의 매끄러운 고음(高音)은 예능 프로그램 방청객들의 표를 얻지 못했다.

비음(鼻音) 섞인 두성(頭聲)으로 힘 안 들이면서 정확한 고음을 내는 그의 창법은

'포효하는 가창력'을 원했던 방청객들에겐 너무 성의 없게 보였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전공이 아닌 '악쓰기'에 도전하는 무리수를 둔 끝에 탈락하고 말았다.

아무리 김연우가 포효해봐야 '진짜 호랑이' 임재범이 버티고 있는 무대에서 돋보일 리가 없다.

한국적 솔(soul)을 줄곧 노래해 온 BMK도 이 프로그램에서 황당한 경험을 했다.

그가 변진섭의 '그대 내게 다시'를 재즈 피아노 트리오로 편곡해 불렀더니

방청객은 가차없이 '꼴찌'라는 수모를 안겨줬다.

그다음에 BMK가 도전한 곡은 '아름다운 강산'이었다.

그것도 이선희가 부르던 정통 록에 가깝게 편곡된 상태였다.

그는 이 노래로 2등에 올라 체면을 살렸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흑인음악 전문인 BMK가

'아름다운 강산'을 록으로 불러야만

박수받는 이 프로그램의 제목은 '나는 가수다'가 적합한가.

조동진은 이른바 '가창력'을 들려준 적은 없지만 불후의 싱어로 남아 있다.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가 명곡인 것은 그가 명창이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날'의 음악이 지금껏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

조동익과 이병우의 노래실력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아이돌 그룹과 댄스음악으로 편향된 방송 가요계에

다양한 음악이 공존하는 무대를 소개하겠다"고 약속했던 '나는 가수다'는 결국 '가창력 경연 대회'가 돼버렸다.

시청자들은 이 '고음(高音) 올림픽'에서 누가 금메달을 따는지는 알 수 있겠지만,

누가 진짜 노래를 잘하는지는 알 수 없게 됐다.

<[조선일보]한현우 기획취재부 차장>